간호사가 되는 것은 내 꿈이 아니었다. 사실,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어쩌면 어머니께서 간호사였기 때문에, 그것이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성향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의 나의 첫 전공은 건축공학이었다. 그렇다, 나는 공대생이었다. 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방문했던 날을 떠올린다. 건축공학부와 간호학과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건축공학부는 높은 경쟁률로 붐볐지만, 간호학과는 지원자가 전혀 없었다. 그 장면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때 간호학과에 지원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그러나 내 고등학교 시절 생물 교과 성적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고, 물리를 선택 과목으로 택했던 이과생으로서 나에게는 간호학과는 더더욱 멀게 느껴졌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던 내 인생은 결국 돌고돌아 멀고도 먼 이국 땅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28세라는 나이, 한국 기준으로 보면 늦었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미국에서 간호사가 되었다.
간호에 대한 관심조차 없던 내가 간호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매 순간이 고비였지만, 실습을 나갔을 때의 즐거움은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해 주었다. 원래 어머니와 그녀의 간호사 친구분들이 간호사를 권유하셨을 때, 나는 듣지 않았다. ‘왜 내가?’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튜터로 일하며 학생들을 돕는 경험을 하던 중, 상담 교직원분들의 권유로 마음이 바뀌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주변에는 중고등학생, 대학생, 심지어 20대, 30대임에도 꿈이 없고 무엇을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지 몰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너무 뻔한 길을 간다면 그 또한 지루하지 않을까? 실패와 시행착오, 그리고 멀리 돌아가는 경험들은 당시에는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다 보면, 뜻밖의 인연을 만나고 새로운 길이 열리곤 했다.
이제는 그 모든 과정이 감사하다.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 서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며 ‘포기하지 마’라고 응원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그런 따뜻한 기운이 닿기를 바란다.
미국 워싱턴주에서 김프로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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